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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자산가들이 앞다퉈 탈출하는 나라는 영국이다. 올 한 해에만 9,500명의 영국인 백만장자들이 본국을 떠날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4,200명의 2.26배 이상이자 역대 최대치다. 가장 큰 이탈 요인은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인한 경제적 불안정성의 고착화다. 브렉시트 직후인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7년간 1만 6,500명의 백만장자가 영국을 떠났다. 세계 백만장자 상위 15국 순위에서 지난 10년간 독일·프랑스·미국·호주 등에서는 백만장자 수가 늘어난 반면에 영국의 백만장자 수는 8%나 감소했다. 특히 지난 4일 치러진 조기 총선에서 부자 증세를 주장해온 노동당이 승리하면서 세수 확보를 위해 상속세·자본이득세율(부동산·주식·채권 등을 처분해 발생하는 이득에 부과하는 세금)을 올리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는 불안이 탈 영국을 재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도한 상속세 부담으로 한국을 떠나는 상장회사 대주주가 최근 5년 새 2배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7월 14일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외전출세를 신고한 상장 업체 대주주는 총 26명이었다. 이 제도 시행 첫해인 2018년의 13명과 비교해 2배 증가했다. 국외전출세 신고 인원은 2019년 28명으로 급증했다가,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엔 11명으로 축소됐다. 그러나 2021년 18명, 2022년 24명, 2023년 26명으로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법인을 운영하는 대주주가 해외로 이주할 때 소유한 국내 주식에 물리는 세금인 ‘국외전출세’를 낸 인원이 매년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7월 18일 국세청의 ‘국외전출세 신고 현황(2018∼2023년)’에 따르면 지난해 ‘국외전출세’를 신고한 인원은 총 26명, 세액 규모는 92억 8,500만 원으로 파악됐다. ‘국외전출세’는 대주주가 해외로 이주하는 경우 보유하고 있던 국내 주식을 출국 당일에 매각한 것으로 간주해 세금을 매기는 제도다. 과세 대상은 거래소 상장사 지분 1% 또는 50억 원 이상을 가지고 있거나 코스닥 등록 업체 지분 2% 또는 50억 원 이상을 보유한 대주주다. 때문에 국외전출세 신고 현황은 상속·증여세 부담을 피하려는 납세자들의 국외 이탈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로 활용된다.
국외전출세 신고 인원이 꾸준히 늘어나는 배경에는 주요국보다 월등히 높은 상속세율이 자리하고 있어서다. 우리나라 상속세제는 상속 재산 규모에 따라 10∼50% 누진세율을 적용한다. 과세표준이 30억 원이 넘는 상속 재산에 최고세율 50%를 부과한다. OECD 국가 중 일본 55%에 이어 두 번째로 높지만, ‘최대 주주 주식할증제도’를 적용하는 경우 우리나라의 최고세율은 60%까지 올라 OECD 회원국 중 단연 1위로 부상한다. OECD 회원국의 평균 상속세율은 26%로 우리나라는 OECD 평균보다 2배 이상 높다. 기업인들의 세 부담 경감 외에도 상속세 일괄 공제금액 5억 원이 1997년 이후 바뀌지 않고 있어 상속인들의 ‘가처분소득’을 늘려 소비를 촉진하고, 기업 투자와 고용 창출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달 영국 투자이민 컨설팅업체인 ‘헨리앤드파트너스’가 발표한 ‘2024년 개인 자산 이주 보고서’에서도 한국의 고액순자산(100만 달러 이상 유동성 투자 가능 자산) 보유자 순 유출이 올해 1,200명으로 중국·영국·인도에 이어 4위를 기록할 것으로 예측됐다. 한국의 고액 자산가 순유출은 2022년 400명에서 지난해 800명으로 2배 늘어나는 등 매년 급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상장사 대주주, 부자들의 ‘한국 엑소더스(Exodus 대탈출)’ 주요 요인으로 징벌적 상속세 등 과도한 세금 부담을 꼽았다. 우리나라 상속세 최고세율은 최대 주주 할증까지 더하면 60%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2000년에 최고세율을 인상한 뒤로 바뀌지 않아 24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다. 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들은 상속세를 없애거나 물가 상승 등을 반영해 세제를 합리적으로 개편해왔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기업승계제도 개선은 결코 쉬워 보이거나 녹록지 않다. ‘부(富)의 대물림’이라는 사회적 반감이 기저에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민단체에서는 정부가 세수에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세제 개편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는 최근 입장문을 내고 “자산 불평등을 고착화할 상속세 완화, 종부세 폐지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한다”라며 “상속세를 개편하더라도 상속세 비중이 줄어들지 않도록 세수 중립적으로 과표구간과 세율을 조정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상속세제 개편에 대한 국민의 공감대도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참여연대가 지난 7월 2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상속세 최고세율을 현행 50%(최대 주주 할증 적용 시 60%)에서 30%로 인하해야 한다는 정부‧여당의 입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48%가 반대 입장을 밝혔다. 찬성은 36%였다. ‘상속세 인하 정책이 세수 부족과 복지예산 축소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50%가 ‘그렇다’라고 응답했다. 이렇듯 상속세 인하 정책이 미치는 영향과 관련한 문항에서는 더욱 부정 의견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응답자의 50%가 상속세 인하가 부의 대물림과 자산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세수 부족과 복지예산 축소로 이어질 수 있다고 답변했다. 특히 상속세 인하가 자산 양극화를 심화시키지 않고 복지예산 축소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부정 응답(자산 양극화 부정 응답 27%, 복지예산 축소 부정 응답 30%)에 비해 우려를 표하는 긍정 응답이 두 배 가까이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기업 상속세율을 50%만 낮춰도 일자리 26만 7,000개를 창출할 수 있다. 영국, 일본 등 해외 주요국은 가업상속공제를 활용해 자국 기업 존속, 일자리 유지, 국가경쟁력 강화를 도모했다. 우리 정부는 중소·중견기업을 국가적 차원에서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해 가업승계제도를 마련했다. 그러나 관련 법령에서 요구하는 사전·사후 요건이 까다로워 법의 취지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세제지원 확대는 특정 계층을 중심으로 부(富)의 대물림을 장려하고 합법적으로 상속세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등 사회적 반감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승계를 완료한 기업은 전체의 3.5%에 그쳤다.
그러나 기업 상속세율은 일자리 창출 문제와도 직결된다. 중소기업중앙회와 민간 경제 연구 기관 파이터치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가업 상속세 감면에 따른 경제적 파급 효과’ 제하의 보고서에 따르면 최대 주주 주식할증제도를 폐지하고 상속세율을 30%까지 낮추면 최대 2만 3,000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추산됐고 최대 주주 주식할증제도를 폐지하고 동시에 최고 상속세율을 OECD 평균인 26%로 낮출 경우, 일자리 창출 2만 6,000개와 실질 GDP 5조 3,000억 원, 실질 설비투자 3조 3,000억 원 증가 등 그 파급 효과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됐다. 기업 상속세율을 50% 인하하면 매출이 139조 원 늘고, 일자리는 26만 7,000개 증가하는 효과가 나타난다. 최대 주주 주식할증제도 폐지와 상속세율 인하 조치가 동시에 진행하는 경우 더 큰 효과를 얻을 것으로 연구원은 설명했다. 상속세율을 인하하면 세금으로 나갈 돈이 기업 투자로 연결돼 더 많은 일자리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보고서는 “그리스의 경우 2003년 기업 상속세율을 20%에서 2.4%로 대폭 인하해 가업을 승계한 가족 기업의 투자가 약 40% 증가했다”라고 밝혔다.
대통령실 성태윤 정책실장이 최근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상속세 개편 필요성을 언급한 뒤 낡은 세제를 손질하자는 논의가 확산하고 있다. 정부도 이달 말 세제 개편안 발표를 앞두고 최대 주주 할증 폐지, 가업상속공제 한도 확대 등의 상속세 개편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가계와 기업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고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여야는 상속세율을 글로벌 평균인 26% 수준으로는 어렵더라도 30%수준으로 낮추는 등 더 획기적인 방안까지 심층 논의하고 관련 입법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회원국 중 상속세가 없는 나라는 37.8%인 14개국이다. 상속세를 부과하는 OECD 22개국 중 17개국은 직계비속에게 상속세를 부과하지 않거나 큰 폭의 세율 인하를 제공하고 있다. 영국, 일본 등 해외 주요국은 가업상속공제를 활용해 자국기업 존속, 일자리 유지, 국가경쟁력 강화를 도모했다.
상속세의 세율 구간도 문제다. 현재 상속세는 과세표준 기준으로 1억 원까지는 10%, 이후 초과분에 대하여 계속 과세율을 10% 단위로 증가해 과세하고 있다. 30억 원 초과분엔 50%의 세율이 적용되고 있으며, 이는 1999년부터 24년 넘게 유지됐다. 그동안의 자산 가격, 특히 부동산 가격 상승을 고려할 때 세율 구간 개편은 시급하다. 현재 상속세 대상 43%가 10억~20억 원으로 이들이 아파트 한 채 상속 땐 세금 폭탄을 맞게 된다. 배우자 공제율도 개편 대상이긴 마찬가지다. 미국과 영국에는 배우자 공제에 한도가 아예 없으나, 우리나라는 아주 낮아 개편이 필요하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상속세의 경우 과세 대상 피상속인(상속 재산을 물려주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는 만큼 젊은 세대의 창업 유인 등을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상속세 부담을 유예하거나 공제제도 등을 확대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과세 대상 피상속인 수는 1960년대 이후 2000년대 이전까지 평균 1,333명 수준이었다. 총 피상속인 중에서 과세 대상 피상속인이 차지하는 비중도 2008년 이전까지 1% 미만이었다. 하지만 자산 가격이 상승하면서 과세 대상 피상속인 수는 2022년 1만 5,760명, 총 피상속인 중 과세 대상 비중은 4.5%로 가파르게 증가했다. 또 중장기적으로는 재산분배 전 피상속인 남긴 유산총액을 기준으로 하는 현행 ‘유산세’ 방식에서 상속인의 취득재산 가액을 과세 대상으로 삼는 ‘유산취득세’ 방식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물가와 자산 가격 상승으로 상속세 납부자가 많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피상속인의 4.5%(2022년 기준)만 상속세를 내고 있다는 것도 개편 논의에 부담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 상속세 최고세율과 공제액 등을 ‘부자 감세’ 프레임 덫에 갇혀 각각 24년, 27년 넘게 손질하지 못했다. 그 사이 집값과 물가가 뛰며 중산층에게까지 큰 부담을 지우는 ‘소리 없는 증세’가 이뤄졌다. 대한상공회의소 등 6개 경제단체도 지난 6월 27일 보고서를 통해 경제 활성화를 위해 상속세 개편을 강력히 주장했다. 야당에서도 세제 개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런 정치권의 움직임과 국제적 추세 그리고 당면한 우리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정치권도 ‘부자 감세’ 프레임을 뛰어넘어 상속세 등 세제 전반의 신중히 합리적 개편에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징벌적 상속세를 피해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사실상 상속세가 없는 곳으로 옮기는 점이 이를 충분히 방증한다. 아직은 부자를 백안시(白眼視 │ 눈을 하얗게 뜨고 흘겨봄)하는 풍토도 여전히 깔려 있다. 부의 축적에 여전히 적개심(敵愾心)을 갖고, 반시장 정책과 징벌적 규제가 난무하는 곳에서 거주 이전의 자유를 가진 멀쩡한 이들이 살 이유가 없을 것이다. 결코 이들을 옳은 처신이라 치 세우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 부재와 정책 불확실성으로 이들을 해외로 내모는 치둔(癡鈍)의 우(愚)를 범해서도 안 된다. 상속세제 개편에 대한 국민의 공감대도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24년 만의 상속세 개편을 놓고 ‘낙수효과’와 ‘부자 감세 및 세수 펑크’의 갑론을박(甲論乙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정치권의 고민이 클 수밖에 없다. 보다 의미 있는 고민이 되도록 정치권의 지혜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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